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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를 통해 본 사법정의카테고리 없음 2022. 10. 27. 21:24
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는 2008년 개봉한 영화로 억울하게 성추행범으로 몰린 주인공 텟페이의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이 영화를 통해 법정에서의 정의(JUSTICE)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간략한 줄거리
철을 탔던 주인공 가네코 텟페이가 치한으로 몰려 현행범 체포 된다. 물적 증거는 없는 상태, 하지만 피해자인 여학생은 텟페이를 범인이라고 진술하고, 주인공 텟페이는 끝까지 무죄를 주장하지만...형사사건에서 피해자의 편에 선 유일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검사입니다. 그렇다면 피의자, 혹은 피고인이 무죄판결을 받는데 가장 공헌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 역시도 역시 검사입니다. 때문에 검사가 추구해야하는 정의에는, 피해자의 정당한 권리 뿐만 아니라, 가해자로 의심 받는 피의자의 헌법상 권리 또한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수의 피의자나 피고인은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내가 하지 않았다” 특히나 성추행과 같은 범죄는 현행범체포가 아닌 이상은 뚜렷한 증거가 없는 경우 더욱 그럴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 검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여기서 검사가 지켜야 할 원칙은 분명합니다.
증명의 단계에서 의심스러울 때에는 피고인의 이익으로(in dubio pro reo)”
쉽게 말해,‘검사 네가 범죄자 유죄 입증 제대로 못하면 무조건 피고인한테 유리하게 판결 내릴거야’정도의 원칙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나타난 검사의 모습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공명정대한 정의의 여신 디케가 아니라, 전지전능을 내세운 무법자 제우스 일 것입니다. 제우스는 자기가 신들의 형평과 공평을 대변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기 마음이 가는대로 움직이는 무법자에 가깝습니다. 그는 인간들의 분노와 사랑, 전쟁과 평화에는 사실 큰 관심이 없었고 그냥 그때그때 간절히 기도하는 듯 보이는 자의 편을 들어줬을 뿐이었습니다.
영화에서 나타난 검사에게 받은 필자의 느낌은 이러했습니다. ‘저 어린 소녀가 용기를 내어 진술하고 있다. 이 순수한 영혼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다.’ 그는 소녀의 기도에서 감동을 받고선, 피고인에 유죄추정의 심판을 내렸습니다. 그는 유죄의 증명을 하려 애쓰지 않았고, 유죄의 정황을 만들려 애썼습니다. 주인공 텟페이 에게 유리한 진술을 했다는 여성을 굳이 찾으려는 귀찮음을 감수하지도 않았고, 무죄일 가능성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구속수사 등을 유죄의 정황을 만들기 위한 도구로 활용했습니다.
영화에서 주인공의 유죄를 입증할 확실한 증거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우리 형사소송법을 포함하여, 선진 법치 국가들의 형사법의 공통 키워드는 증거와 증명에 있습니다. 즉, 「사실의 인정은 증거에 의하라. 범죄사실의 인정은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의 증명에 이르러야만 한다.」 이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할 것입니다(형사소송법 제307조).
그렇다면 영화에서 주인공은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의 증명에 이르지 못했으므로’, 무죄판결을 받았어야 했지만, 그는 유죄를 선고받았고 마지막에 주인공이 마음속으로 외치는 말속에 우리는 사법시스템의 내재적 한계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재판관이 말했다. 진실은 신만이 알 수 있다.
그건 틀린 얘기다.
이곳에선 나만이 진실을 알고 있다.
나만이 판단 할 수 있다.
재판관을 심판한다.
당신은 오늘 실수했다.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中>
어쩌면, 주인공의 독백은 정의를 위한다는 명목 아래에 지금까지 가려져 오던 사법재판의 아킬레스건을 드러낸 대목이라 할 것입니다. 과연 사람이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이 타당할까요?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더 심각한 사실은, 나의 진실과 상대방의 진실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인공이 여학생의 엉덩이를 만지지 않았다는 것은 진실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여학생의 엉덩이를 만졌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상반되어 보이는 두개의 진실이 공존하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을 심판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이처럼 재판이라는 것도 서로가 서로의 진실을 주장하기에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가장’ 공정하고, ‘가장’ 전문적이라고 생각되는 제3자에게 판단을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심판한다는 사법시스템 자체는, 그 제3자는 절대로 완벽한 진실을 알 수 없다는 아킬레스건을 가졌지만, 우리는 사법재판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완벽한 진실을 찾는 최선이 불가능하다면, 차선을 선택해 사법 질서 속에서 법과 질서를 수호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더욱 중요한 것이 위에서 언급한 증거와 증명에서의 합리성일 것입니다. ‘죄 없는 사람 한명을 벌하는 것보다는 죄 있는 자 열명을 풀어주는 것이 낫다’는 고언은 진리입니다. 판사는 죄가 있음을 확신하지 못한 때까지 마치 신(GOD)이 된 것 마냥 행동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판사는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사건에서 영화 속 주인공 텟페이에게 무죄를 선고했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판사가 나쁜 감정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라는 변명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무죄인 사람이 유죄선고를 받고 고통 받는 일은 그 어떤 변명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